예술인의 복지, 큰 배우의 역할

‘예술적’이고 ‘복지적’으로 살아가는 가수 최씨

어 해 전 일이다.
홍승기. 인하대학교 로스쿨 교수, 배우
대학로 예술인복지재단 이사회를 마치고 주차장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가수 최씨와 나란히 걷게 되었다. 두 사나이가 과묵하게 앞만 보고 걷기는 어색했다. 급히 공통의 화제를 떠올렸다. “저작권 수입이 좀 들어오지요?” “너무 많이 들어옵니다. 사회에 죄송합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데, 죽고 나서도 70년 아닙니까? 대기업 임원 연봉 정도는 될 것입니다” 그의 대답에 가슴이 서늘했다. 여러 예술가에게 비슷한 질문을 했었다. 대답은 판박이였다. “세금이 너무 많아요.” “협회가 너무 많이 떼어가요.” 그렇게 두 문장이 순서를 달리하며 등장할 뿐이었다. 최씨는 말을 이었다. “한 달에 1억 원이나 저작권료를 받는 아이돌 가수에게 ‘기부’를 권했더니 귀를 닫습디다. 그러면 안 되는데요.”
그날 이사회에서 최씨는 보기에 민망할 만큼 사무국을 공격했다. 예술인복지재단이 인터넷으로 복지사업을 홍보하면, 스마트폰을 이용할 형편도 안 되고 인터넷을 사용할 줄도 모르는 가난한 원로 예술인들이 어떻게 혜택을 누릴 수 있겠냐고 화를 냈다. 모름지기 예술인복지재단이란 직원들이 쌀가마니를 메고 어려운 예술가들을 찾아 달동네를 오르내려야 그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와 마주 앉아 있던 나는, 이상적이기는 하나 현재 인력으로는 불가능한 업무 방식이라고 사무국을 두둔하고 싶었으나 최씨가 기세등등해 나서지는 않았다. ‘나이는 먹고 철이 없는 대중예술가의 낭만적 투정’ 정도로 최씨를 무시하려 했을 뿐이다.
최씨가 음악인 동료들과 저작권 수입을 털어 형편이 어려운 원로 음악인들 댁으로 쌀가마니를 날라 왔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지자체를 설득하여 젊은 예술가들의 연습공간을 마련하여 주었다는 소문도 들었다. 전혀 연예인답지 않은 수더분한 차림으로, 강한 사투리의 투박한 말투를 쓰는 그가 살아가는 방식은 지극히 ‘예술적’이고 ‘복지적’이었다.

철학도 재원도 없이 진행된 예술인 복지법

예술인복지법을 만들던 무렵, 법의 내용이며 예술인복지법의 정관에 대하여 의견을 달라는 전화를 여러 번 받았다. 그때마다 퉁명스럽게 성의 없이 몇 마디 거들고 말았다. 가엾은 시나리오 작가의 비극적 죽음을 계기로 여·야가 전격적으로 입법을 하였다는데, 입법과정이 헐리우드 액션과 흡사했다. 국회의원들이 한 건 했다고 으스대는 모습은 눈에 선했으나, 철학도 재원도 보이지 않았다. 정부가 이미 보편적 복지를 시행하고 있는 마당에 예술인에게 2중 복지를 하겠다는 근거도 애매하고, 근거가 명확하지 않은 바에야 재정부처가 ‘업무상 배임’의 위험을 무릅쓰고 예술가를 위하여 돈궤를 열리가 없다. 그래서 예술인복지재단이 불공정계약에 대처하기 위해 분쟁조정제도를 만들겠다고 할 때도, 신문고를 설치하겠다고 할 때도 짜증만 냈다. 복지재단이 대학로에 문을 열었으니 우선 대학로 예술가들이 수혜자가 되어야 할 터인데, 사실 대학로 제작자의 궁핍한 사정도 뻔히 보였다. 쓸 데 없이 판만 벌린다는 생각에 불쑥불쑥 부아가 치밀었다.
예술인 복지 논의는 20년도 더 이전에 연극계에서 나왔다. 친한 연극쟁이가 프랑스와 독일의 예를 들며 논의에 참여하라고 권했으니 그때도 냉소를 날렸다. 통계자료로는 연극인 연소득이 수백만 원이라는데, 그들이 어떻게 대학로에서 매일 술판을 벌이고 있는지 그 미스터리를 풀기 전에는 연극인의 복지운동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심술을 부렸었다.
그리스에서는 배우가 죽으면 국장(國葬)을 한단다. 정치적 실세도, 재계의 거물도 죽으면 조용히 가족 품에 안기고 말지만, 배우는 시민의 애도를 뒤로 하고 장중하게 하늘로 떠나가는 것이다. 배우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그렇게 대단한 것은. 배우가 경제적 보상에 연연하지 않고 의연하게 영혼을 정화하는 작업에 정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배우들이 느끼는 자부(自負)에 더해 그들에게 요구되는 사회적 책임감도 상당할 듯 싶다. ‘미스 그리스’ 선발대회 참가자에게 적어도 3년간의 배우 수업을 요구한다는 참가요건도 그러한 배경에서 이해가 된다

저작권 수익으로 예술인 복지를 해결할 수 없을까?

“세상에 엑스트라 배우는 없다. 다만 맡은 배역이 시시할 뿐이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 명동국립극장에서 본 뮤지컬 <철부지들>의 대사이다. 주연배우에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는 잔잔한 역할을 맡아 준 동료의 지원 덕분에 가능하다. 황정민의 수상소감 ‘차려 놓은 밥상’ 스토리는 스텝들에게 뿐만 아니라 동료 배우들에게도 타당하다.
저작권 수익으로 예술인 복지를 해결할 수 없을까? 능력이 있어서든 재수가 좋아서든 특정 장르 일부 권리자에게 저작권 수익이 폭우처럼 쏟아진다. 저작물이란 먼저 살다간 선배며 함께 살고 있는 동료로부터 음으로 양으로 도움 받은 결과물이다. 강풍에 나뭇가지가 쏠리듯 한쪽으로 후루룩 떨어지는 저작권의 낙과(落果)는 다분히 사회 전체가 이룬 디지털 혁명의 성과이다. 그렇다면 저작권 수익의 은총을 입은 오늘의 운 좋은 배우는 동료의 자부심을 배려할 의무가 있다. 미분배보상금을 이용하든 전체 저작권 수입의 일부를 떼어놓든, 예술계 내부에서 예술인 복지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아쉽다. 그래야 예술인들이 국민으로부터 존경 받을 수 있고, 배우의 국장을 마련할 여지가 생긴다. 국고에 손 벌리는 건 다음 문제다.